IMDB: 7.5/10 | Rotten Tomatoes 92%
*이 글은 영화의 러닝타임 15분 정도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시점까지의 스포일러는 포함되어 있지만, 핵심적인 스포일러는 미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은 영화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영화가 됩니다. 열 사람이 보면 열 개의 다른 영화가 태어나죠.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영화도 그러합니다. 그게 예술의 위대한 점이겠죠.
저도 영화를 볼 때 저만의 관점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 건 없습니다. 애초에 답은 없으니까요. 다르단 건 오히려 좋은 겁니다. 모두가 영화를 보고 똑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지루한 세상일까요. 그래서 제 생각을 먼저 밝히고 소통하려 합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 역시 여럿입니다. 제가 해보려는 것은 영화를 ‘읽는’ 것입니다. 한 씬은 눈깜짝할 사이 지나가지만, 각 장면은 감독의 고심 끝에 나온 결과입니다. 찰나에 지나가는 씬을 음미하면, 감독의 생각이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영화를 ‘읽어 보려’ 합니다
다섯 번째 작품으로는 <프란시스 하>를 골랐습니다. 이 영화는 아마 카나에서 영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분명한 재현이가 추천해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영화를 추천해 준 재현에게 감사 드립니다 :)
이 영화를 추천 받은 순간 정말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감독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 노아 바움백은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뉴욕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 대표적인 감독입니다. 최근 작인 <매리지 스토리>에서도 뉴욕 남자와 서부에서 온 여자의 결혼 이야기를 다뤘죠. 비록 넷플릭스를 겨냥하여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가장 먼저 공개된 곳은 뉴욕 필름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저도 거기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었는데, 저의 영화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감독의 다른 작품인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역시 뉴욕이 배경입니다. 주인공이 맨하탄에 있는 Barnard 대학의 학생으로 나오죠.
영화에 버나드 대학의 남매 학교인 컬럼비아 대학도 살짝 나오는데, 스크린에서 보니 굉장히 반갑더군요. 예고편에도 나오는 밑의 순간입니다.
뉴욕을 대표하는 또다른 감독이라면 역시 일전에 <맨하탄>에서 소개 드린 우디 앨런이 가장 유명할 것 같습니다. 한 명만 더 언급해보자면 스파이크 리가 있습니다.
그의 출세작인 <Do the Right Thing>에서 브루클린의 흑인들의 삶을 다룬 적이 있죠. 뉴욕 닉스의 유명한 광팬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예고편을 먼저 붙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흑백 영화라는 점입니다. 공교롭게도 소개해드린 다른 뉴욕 배경의 영화 <맨하탄> 역시 흑백이었네요. 건조한 흑백 영화가 시크한 뉴요커를 다루는데 있어서 좋은 형식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위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공원 같은 곳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왼쪽은 우리의 주인공인 프란시스입니다. 이 영화 제목 <프란시스 하>는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다만, 성이 ‘Ha’는 아닙니다. 왜 풀네임 대신 ‘Ha’ 라고만 제목에 걸리게 된지는 영화를 보면 알게 됩니다.
주인공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내건 영화가 여럿 있습니다. <The life of David Gale> 같은 영화이지요
제목에 이름을 넣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요체이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이 영화에서 하는 행동은 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옥자> 역시 주인공 중 한 명의 이름입니다
옥자는 이 영화가 지키고자 하는 것 자체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창조된 옥자가 희생당하는 것을 다른 인간들이 막으려 한다는 것이 <옥자>의 내용이니까요.
<프란시스 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라는 캐릭터 자체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럼 그녀가 어떻길래 영화로 만들 정도일까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죠.
주인공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소울 메이트인 소피입니다. 현 룸메이트이기도 하죠. 둘은 함께 공원에서의 한 때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폼이 심상치 않죠? 그들은 “가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짜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가격이 있기도 합니다. 꽤 심각하죠. 지나가는 사람이 이들을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뉴욕엔 별별 사람이 다 있어서 조금만 이상한 모습이 보이면, 또 그런 별종인가 보다 쉽게 생각하죠. 이들 역시 누군가의 눈엔 ‘별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비록 남들은 “가짜 싸움”의 재미를 모르지만, 둘 만큼은 누구보다도 재미있게 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를 받지는 못하지만 둘만큼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해주는 친구입니다. 말도 잘 통하고 농담도 딱딱 들어맞죠. 소피는 프란시스의 진정한 소울 메이트입니다.
프란시스를 연기한 배우는 그레타 거윅입니다
그녀는 감독 노아 바움백과 실제 오랜 연인 사이입니다. 얼마 전에 둘 사이에 아이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둘은 연인일 뿐 아니라 오랜 협업을 이어오고 있기도 하죠. 이 작품에서도 감독은 노아 바움백이지만, 각본은 둘이 공동집필하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실제 그레타 거윅의 삶과 닮아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주인공인 프란시스와 그레타 거윅은 모두 고향이 세크라멘토입니다. 실제 그레타의 부모님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부모님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하죠.
이렇게 노아의 영화에 각본가 및 배우로 참여하던 그레타는 얼마 전부터는 본인이 직접 감독으로 연출 중입니다. 첫 작품인 <레이디 버드> 이후, 작년에는 <작은 아씨들>도 만들었죠. 두 작품 모두 참 좋은 작품입니다.
이제는 노아 바움백의 그늘에서 벗어나 어엿한 주목할만한 감독의 반열에 오른 그레타 거윅입니다. 작년에 그레타 거윅이 오스카 감독 후보에 오르지 못했을 때, 여성 감독이 후보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꽤 이슈가 되었습니다. 모두 그레타가 후보에 오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연출은 좋았습니다.
<프란시스 하>는 두 사람의 협업의 원전 같은 작품입니다. 이후 <미스트리스 아메리카>를 통해 둘의 협업은 한 번 더 지속됩니다. 2012년 작인 <프란시스 하>는 당시 노아 바움백의 뮤즈라 불리던 시절의 그레타 거윅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보죠. 영화는 “가짜 싸움”에서 시작해 한참을 프란시스와 소피가 노는 장면을 2분 가까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목이 뜹니다
제목이 지나가면 씬이 바뀌어 있습니다. 카메라는 프란시스와 그의 남자친구를 비추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는 프란시스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소울메이트인 소피와 함께 살고 있고, 아마 계약 연장을 하게 될 것 같아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사실 이 연인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아 보입니다.
남자친구와 있지만 걸려온 소피의 전화를 받아야 하죠. 화가 난 남자친구의 표정이 볼 만하죠?
그리고 프란시스가 남자친구의 제안을 거절한 순간, 둘을 한 화면에 잡고 있던 영화는 갑자기 두 사람을 분절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기존에는 누가 이야기하던 간에 두 사람을 모두 한 화면에 같이 넣던 영화가 이제는 화자에 따라서 그 사람 한 명만 화면에 보여주죠.
그리고 둘의 사이가 더 나빠지면서, 이제는 아예
타이트하게 인물을 잡던 카메라는 인물에게서 멀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별을 고하고 맙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소피죠.
그녀는 여전히 소피와 함께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영화는 위의 장면으로 보여주죠. 영화는 이렇게 소피가 머무르는 곳을 자막으로 인서트하여 이를 마치 소제목처럼 활용합니다. 일전에 <헤이트풀 에이트>에서 타란티노가 챕터를 나눈 것을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이 영화는 주소를 챕터를 나누는 방식으로 활용하죠. 말이 되는 방식이라 봅니다. 저도 생각해보면 제가 어디에 살았던지에 따라 제 삶의 챕터를 나눌 수 있어 보입니다. 경주, 관악사, 녹두, 낙성대, 문정, 가락, 그리고 뉴욕. 각각 시간의 테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역시 부동산이 중요한 뉴욕 답게 멋진 방식으로 챕터는 나눕니다. 프란시스는 현재 소피와 머물고 있습니다.
소피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이 아저씨입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능력있는 남자이긴 하지만 소피와 프란시스 모두 알고 있습니다. 물흐르듯 농담이 잘 통하는 소피와 프란시스 대비, 소피의 남자친구와 소피는 자연스러운 사이는 아니라는 걸 말이죠. 하지만 소피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착하고 능력도 있죠. 그거면 그녀에게는 충분해 보입니다.
이 영화는 분명 프란시스에 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소피는 프란시스의 거울과 같은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둘은 굉장히 닮아 있지만, 그들이 삶에서 하는 선택은 매우 다릅니다. 프란시스가 공중에 붕붕 떠있는 사람이라면
소피는 땅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죠.
혹자는 프란시스는 허황되고 소피는 현실적이라고 할 지 모릅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본다면, 분명 소피가 더 행복한 삶을 살 확률이 높아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화가 비슷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는 좀 더 살펴 봅시다. 결국 이 영화는 프란시스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가 화두이니까요.
다음 씬에서 우리는 프란시스의 직업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댄서입니다.
하지만 일이 많지 않죠. 전형적인 배고픈 예술가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재능이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재정적으로 매우 빈곤합니다.
발레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일이 있다 없다 합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쇼에서 엑스트라 무용수 자리라도 간절히 바라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네요. 사랑도 일도 잘 풀리지 않던 와중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됩니다.
바로 소피가 이사를 하려 한다는 것이었죠. 당연히 소피와 같이 계약 연장을 할 걸로 생각했던 프란시스는 벙집니다. 그것때문에 화근이 되어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던 그녀란 말이죠. 하지만 소피는 남의 속도 모르고 트라이베카에 집을 마련한 다른 친구 집으로 쌩하고 가버립니다. 다시 못 올 기회이기 때문이죠. 둘이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나이브한 프란시스가 지레짐작하던 부분이 화근이 된 셈이죠. 반대로 소피는 현실적입니다. 더 좋은 기회가 있으면, 친구와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기회를 잡습니다. 불쌍하게 남겨진 것은 소피입니다. 혼자서 렌트를 내기엔 턱없이 모자란 그녀의 주머니 사정은 그녀를 기로에 서게 만듭니다.
과연 그녀는 이 험난한 뉴욕의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꼭 헤쳐 나가는 것만이 능사일까요? 아마도 영화는 위기를 극복하는 자기계발 식의 성장 이야기는 아니어 보입니다. 하지만 성장이 아니라면 이 영화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프란시스의 풀네임이 아닌 ‘프란시스 하’에서 짤리는 이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가장 보통의 뉴욕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프란시스 하>였습니다.
Writer: Seil Kim I 김세일 <seil88.kana@gmail.com>